어떤 이야기. 1.

나열, 감정의 나열

2017. 10. 19. 06:09




그날도 노을빛이 세상을 깊게 물들였던 날이었다.
노을빛 속 사물들은 주황빛깔과 주황색 내음을 내뿜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짧은 자신의 아름다운 추억을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 생각한다. 우리의 삶이 24시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체험하는 시간은 잠시, 노을이 질 때, 그 순간이 아닌가 하고.
“지금, 떠나는 거야?”
“……응.”
갈색 머리와 노을빛의 조합은 숨이 막힐 듯한 마력을 내뿜는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순간, 그녀를 바라본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럼…… 언제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못 올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긴 시간동안 그동안의 여러 추억이나, 그녀를 위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한 체, 그저 짤막한 직구를 던져버렸다.
“……”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그녀에게, 짧은 노을빛이 물든 시간에, 나는 더 이상 어떤 물음도 생각해 내지 못한 체로 묵묵히 그녀와 함께 길을 걸었다.
그래도, 그래도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저기, 어디 앉을까?”
“응”
벤치에 앉아도, 떠오르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응? 왜?”
나의 시선을 느낀 듯, 아까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자세로 땅만 묵묵히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마주본 눈.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은 정말로 영원과도 같이 느껴졌었다.
“그, 그…… 너를 기억하고 싶어서.”
백지장처럼 하얗게 된 머릿속엔 내 입에서 나올 말의 검토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심장에서 나온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어?”
그녀의 얼굴이 붉으스름해졌다. 아니, 노을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을 내가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멍하게 있더니,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나도 너를 기억하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의 두 눈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은 체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노을빛이 사라져갈 때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도 나를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만보고 있는데도, 나는 그녀의 심장에 귀를 갖다댄 것처럼 그녀의 심장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를 깊숙이 더 따듯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을빛은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해어짐의 시간에도 나와 그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안녕.”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생각난다.
특이할 것 없는 그 한마디. 하지만, 그녀와 제일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느꼈던 나는 그 짧은 한마디의 단어가, 이 세상 어떤 수식어나, 명언보다도 아름답고 가장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제 안녕. 나의 첫 번째 사랑이여.


20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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