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나열, 감정의 나열

2018. 1. 11. 20:01

 

 

  그녀가 말했다. 자신에게 남친이 있다는 것을 주변사람들이 알게 되면, 주변사람들의 접근이나, 그녀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사실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거라고. 나는 그런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알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그래... 나도 이제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의 찐했던 1년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그 순간들이 그렇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
  물론 내가 그녀의 곁에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버렸을 때, 그것이 그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너는 충분히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굳이 나를 기다리며 늙어가지 말라고. 너의 청춘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의 이런 배려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였다. 그녀는 아니라고, 전혀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를 보며 울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었는데...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말한 ‘지금 만나는 사람 없는 척하기’ 통보는 마치 지금이 삼국지에나 나오는 춘추전국시대라는 것을 여러 강호들에게 알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왕이 있지만, 폐위가 가능한 왕.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여러 군데서 거병한 강호의 영웅들. 
  나는 그게 정말로 웃긴 생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딱 좋은 비유였다고도 생각했다.
  왕은 내가 될 수도 그녀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녀의 그 말을 들을 때는 아마 내가 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그냥 친구라고 했을 때에는.
  하지만 내 생각엔 그녀가 그것을 그렇게 나에게 통보를 함으로써, 그리고 내가 그것에 동의를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왕이며, 명목으로서의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유비였다. 아니, 유비만큼 쌔지도, 주변 사람들도 없었으니, 그냥 혼란한 틈에 한실을 위해 거병한 다른 장수랄까?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공공연하게 여친이 있다는 것을 다른 여성들의 접근 사이사이에 은근슬쩍 껴 넣어 남모르게 보이지 않는 커다란 벽을 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모두들 나를 팔불출이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이 마냥 좋았었다. 지금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통보에, 이 관계의 끝은 결국 파국이겠구나라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명목상 한실을 위해 들고 일어선 위선적인 장수가 되어버렸다.
  태초부터 나의 발은 모두 묶여있었고, 이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며 아직도 사랑을 했던 나는, 춘추전국시대에 제일 약한 무장이 되어 있었다. 어찌 저찌해도 최종적인 나의 행복은 없어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저 한실을 생각하는 마음만이 너무 좋은 그런 장수. 아니, 일개 병사.
  이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은 나의 잘못이었던 것일까.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바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그녀와 나의 실질적인 거리상의 문제가 발생했기 떄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곁에서 보좌하던 내가, 다른 지역으로 유배를 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운명론적으로 그녀에게서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 아니, 엑스트라1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뭐 그녀에게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의 마음이란건, 누구도 모르지 않은가? 그도 아니면 내가 못 믿음직스러웠거나. 하기야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그녀와 만나며, 그녀에게서 단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청사진의 끄트머리조차 들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청사진 따위는 어찌되었든 좋았다. 우리가 언제 미래를 약속하고 만난 것도 아니기에,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토록이나 먼 곳에서, 당장 내일의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는 그저 한낱 하루살이같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말하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는 그저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면 정말로 오늘부터라도 너가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에 대한 불안감과 그 말을 하는 너의 표정이 너무나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보여 오늘도, 달려가 너를 잡아보려하지만,

  그저 매 순간순간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한낱 폐위당한 왕처럼 그저 세상엔 관심없다는 눈빛만을 보내는 너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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